
순천시가 산업대전환의 깃발을 들었다. 그 깃발에 적힌 이름은 방위산업이다. 제조업 기반이 흔들리고 청년과 기업이 하나둘 지역을 떠나는 현실 앞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으려는 절박함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문제 삼을 것은 방향이 아니라 속도와 순서다.
선언이 아니라 준비의 문제
방위산업은 이름을 붙인다고 저절로 만들어지는 산업이 아니다. 국방규격과 품질관리, 시험평가, 보안, 조달체계, 그리고 체계기업의 공급망까지 넘어야 할 문턱이 겹겹이 쌓여 있다. 기술력만으로는 진입할 수 없고, 실제로 납품 가능한 제품과 이를 검증할 체계, 그리고 그 제품을 사줄 시장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 그렇다면 순천이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방위산업인가"가 아니라 "순천은 방위산업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다. 산업대전환의 출발점은 육성 선언이 아니라, 순천에 무엇이 있고 그중 무엇을 방산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그 결과물을 누가 사줄 것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공간과 이름이 앞서면 생기는 일
순천시의 구상을 단순화하면 방산혁신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앵커기업을 유치해 지역에 방산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정책은 본래 지역 역량을 분석하고, 전환 가능한 분야를 선정하고, 기업의 시장 진입을 지원한 뒤 공급망을 연결해 생태계를 완성하는 순서로 가야 한다. 산업의 실체보다 클러스터라는 공간과 방산이라는 이름표를 먼저 내세우면 수단과 결과가 뒤바뀔 위험이 있다. 산업단지를 짓고 기업 몇 곳을 유치했다고 생태계가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기업이 들어오고 연구기관이 참여하고 인력이 모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실제 수요가 있어야 한다. 정부 지원사업이 끝난 뒤에도 기업이 스스로 버틸 수 있는 시장이 없다면, 공모사업 선정은 목표가 아니라 다음 위기의 시작점이 될 뿐이다.
앵커기업이 온다고 공급망이 생기지 않는다
앵커기업 유치를 생태계 구축의 핵심으로 보는 시각에는 더 냉정한 질문이 필요하다. "어떤 기업이 왜 순천에 와야 하는가"에 이어, 더 중요한 질문은 "순천의 어떤 기업이 그 앵커기업의 공급망에 들어갈 수 있는가"다. 대기업이나 체계기업 하나가 들어와도 지역기업이 그 공급망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지역에 남는 효과는 제한적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유치한 기업의 숫자가 아니라, 지역기업이 실제로 방산 공급망에 몇 개나 편입되느냐다.
이를 위해서는 순천 기업을 업종별로 나누어 기술, 생산설비, 품질수준, 인증현황을 조사하고 방산 전환 가능 기업을 골라내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정밀가공, 금속·소재, 전장부품, 센서, 모터, 로봇, AI, 소프트웨어 등 순천이 가진 산업기반 가운데 어느 분야가 방산 수요와 맞닿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방산기업을 유치한다"가 아니라 "순천기업을 방산기업으로 만든다"는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완성무기가 아니어도 순천의 자리는 있다
순천이 수도권이나 대전, 창원, 구미와 같은 방식으로 대규모 체계무기 산업을 구축하려 한다면 경쟁력을 확보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순천만이 할 수 있는 방산은 무엇인가.
인접한 광양만권의 철강·금속·소재산업, 여수의 화학산업, 고흥의 우주산업과 연결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완성무기를 만드는 도시가 아니라 AI·로봇·정밀기계·부품·소재 등 방산 공급망의 핵심 후방 거점으로 자리 잡는 전략이 오히려 순천의 현실에 맞는 산업대전환일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전수조사
산업대전환을 실제로 추진하려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첫째, 지역 제조기업에 대한 방산 전환 가능성 전수조사. 둘째, 기술·설비·인력·인증·매출구조 분석을 통한 진입 가능 기업 선별. 셋째, 그 기업들을 어떤 체계기업, 어떤 방산품목과 연결할지 정하는 공급망 매칭. 넷째, 부족한 기술과 인증, 시험평가, 보안체계에 대한 지원. 다섯째, 실제 계약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지속적인 비즈니스 매칭. 이 다섯 단계가 축적돼야 비로소 '순천형 방위산업 생태계'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주어는 방산이 아니라 순천이어야 한다
순천의 질문은 "방산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다. "순천의 어떤 기업이, 어떤 기술로, 어떤 방산시장에 들어갈 것인가"다. 여기에 답하지 못한 산업대전환은 또 하나의 구호로 끝날 수 있지만, 구체적인 답을 만들어낸다면 방위산업은 순천에 실질적인 기회가 될 수 있다.
방위산업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순천의 산업대전환이라는 더 큰 목표를 위해 활용해야 할 도구일 뿐이다. 그 출발점은 거창한 클러스터 조감도가 아니라, 지금 순천에 있는 기업의 생산현장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어야 한다. 순천의 산업대전환은 '방산을 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순천의 기업이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