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남미에서 동시에 나타난 두 개의 방산 이슈가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새로운 전환점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미 해군 군함 10척 건조 가능성을 직접 언급하며 조선 협력을 국가 전략 의제로 끌어올렸고, 남미에서는 페루가 K808-PE 화이트 타이거 장갑차를 처음 공개하는 동시에 K2 블랙팬서 전차까지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에 등장시키며 본격적인 도입 절차를 가속화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단순한 수출 성과가 아니라 'K-조선'과 'K-방산'이 하나의 전략산업으로 결합되는 신호탄으로 평가하고 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배'가 아니라 '생산능력'
외교부는 29일 "한미는 미래형 포괄적 전략동맹 발전을 위해 조선 협력이 중요하다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조선 관련 제반 분야에서 협력 방안을 지속적으로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정부에 "미국 군함 10척을 빠르게 건조할 수 있느냐"고 직접 제안한 이후 나온 공식 입장이다. 정부 내부에서는 기존 조선 협력과 별도로 전담 협의채널을 신설하는 방안까지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한국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재 미국은 함정 설계 능력은 보유하고 있지만 건조 능력은 심각하게 부족하다. 중국은 세계 최대 조선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해군력을 급속히 확대하는 반면 미국 조선소는 인력 부족과 노후 설비로 건조 일정이 계속 지연되고 있다. 반면 한국은 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 등을 중심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군함 건조 기술과 생산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유지·보수(MRO) 분야에서도 이미 미 해군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의회 관계자들이 국내 주요 조선소를 직접 방문해 생산 능력을 점검하는 등 협력이 빠르게 구체화되고 있다. 다만 현실적인 변수도 존재한다. 미국의 존스법(Jones Act)과 국방 관련 법률은 미 해군 함정을 해외에서 건조하는 데 제약이 있어, 행정부의 예외 인정이나 의회의 입법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페루, K808 실전 평가 돌입…K2 계약도 '청신호'
남미에서는 한국 지상무기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페루 육군은 독립기념일 군사 퍼레이드에서 현대로템이 공급한 K808-PE 화이트 타이거 8×8 차륜형 장갑차 30대를 처음 공개했다. 불과 2주 전 인도받은 장갑차들은 현재 전국에서 실전 운용을 위한 성능 평가를 진행하고 있으며, 페루 정부는 40대를 추가 도입하는 2차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 이후 2027년까지 추가 계약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행사에서는 K808뿐 아니라 K2 블랙팬서 전차도 함께 공개됐다. 페루는 1970년대 도입한 소련제 T-55 전차를 대체하기 위해 차세대 전차 사업을 진행 중이며, K2는 뛰어난 기동성과 화력, 디지털 전장체계, 산악지형 적응 능력을 앞세워 가장 유력한 후보로 평가받고 있다. 군 관계자는 현지 언론을 통해 "현재까지의 평가 결과는 매우 만족스럽다"며 계약 체결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미 한국과 페루는 K2와 K808을 포함한 지상무기 협력에 대한 기본 협력체계를 구축한 상태이며, 향후 현지 생산과 기술 이전까지 포함하는 장기 협력 모델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나온다.

K-방산의 경쟁력은 '무기'가 아니라 '산업 생태계'
이번 미국과 페루 사례는 공통점을 갖는다. 과거 방산 수출이 단순히 장비를 판매하는 수준이었다면 최근에는 유지·보수(MRO), 교육훈련, 기술이전, 현지 생산, 공급망 구축까지 포함하는 산업 패키지로 확대되고 있다. 미국은 조선산업 재건을 위해 한국의 생산 능력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페루는 무기 도입을 넘어 자국 방산 기반 육성까지 한국과 협력하려 하고 있다. 이는 한국 방산기업들이 이제 개별 제품이 아니라 국가 전략산업 파트너로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다.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확보하는 한국
최근 몇 년 동안 K9 자주포와 FA-50, 천무 다연장로켓, K2 전차 등이 세계 시장에서 연이어 성과를 거둔 데 이어, 이제는 조선산업까지 미국 안보 전략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해군력 재건과 남미의 지상군 현대화가 동시에 한국 기업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방산 전문가 양현상 박사는 "과거 한국이 무기를 잘 만드는 국가였다면 이제는 동맹국의 안보 체계를 함께 설계하고 생산하는 전략적 파트너로 위상이 바뀌고 있다"며 "조선과 방산이 결합되는 새로운 산업 구조가 한국의 미래 성장동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군함 10척' 발언과 페루의 K808·K2 공개는 서로 다른 대륙에서 벌어진 사건이지만, 결국 하나의 메시지를 전한다. 대한민국 방위산업은 이제 바다에서는 미국의 해군력 재건을, 육지에서는 신흥국의 군 현대화를 동시에 책임지는 글로벌 전략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